순교자 · 성인들의 묘

  • 천호성지에 성 손선지 성 정문호, 성 한재권이 묻힌 것은 1867년이었다. 이 분들이 한 곳에 묻히게 된 것은 세 성인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서 거주하다가 함께 체포되고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생전의 친분 관계도 그랬지만 그들 가족이 천호마을로 피신해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명서 성인은 세 성인들과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셨지만 다른 곳에 묻혀 계시다가 1988년 이곳에 안장되었다. 손선지 성인과 정문호 성인은 충청도 임천의 동향인이다.
    정문호 성인이 대성동 신리골에 살게 된 것은 손선지 성인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또 한재권 성인은 충청도 진잠 사람이었는데 손선지 성인과 평소 친분이 있어서 그가 천호마을에 정착해 있는 것으로 알고 찾아갔었지만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찾아가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이 처형된 후 손선지 성인의 가족이 천호마을로 피신하여 오자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가족들도 함께 왔는데, 이들 두 가족이 거처를 정한 곳은 천호마을과 인접해 있지만 천호와 다름없는 시목동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한 날 한 시각에 처형된 분은 여섯 분이다. 그중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3명은 대성동 신리골에서 살고 있었고, 조화서, 조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 4명은 신리골에서 남쪽으로 3㎞ 가량 떨어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12월 5일 두 마을 신도들이 체포되어 함께 전주로 압송되었다.
  • 숲정이에서 처형된 분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사람은 향리(鄕吏) 신분인 오사현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는 성지동과 인접한 유상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지동은 184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이었고, 대성동 신리골 역시 이 무렵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오사현은 이 두 마을이 교우들의 교우촌인 줄을 모르고 지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에 사는 신도들은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생계를 근근히 이어가는 터라서 가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일상생활의 몸가짐은 누구나 본받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오사현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밀히 알아 본 결과 놀랍게도 나라가 금하고 있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이 비천하게 살면서도 훌륭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향리(鄕吏)의 신분으로 천주교도들을 관가에 고발해야 했지만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도 언젠가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내심 다짐하고는,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그는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교한 후 착실히 수계범절을 하다가 선종했다.) 그리고 평소 성지동에 사는 조화서 성인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오사현은 마음으로 아끼던 천주교도들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자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신도들을 구명하기 위해 전주 감영으로 찾아가 평소 친분이 있는 관원들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 날 방도가 없을까 물었다.
    관원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당장 풀어줄 뿐 아니라 압수한 재물도 돌려주겠는데 저들이 막무가내로 죽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현은 신도들을 살려볼 요량으로 그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권고하기를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배교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자기들의 구명을 위해 애쓰는 오사현의 인정에 고마워하면서도 배교 하라는 말을 하려거든 다시는 옥에 나타나지 말라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신도들은 옥중에 있는 동안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교리를 토론했다. 이런 모습을 본 옥지기는,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매일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즐거워하니 도대체 네 놈들은 어떻게 된 놈들이냐' 하며 혀를 찼다. (입전에선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사현은 옥으로 신도들을 찾아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살아서 나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 우선 배교한다고 말하고 석방된 후에 다시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교우들은 오사현에게, '우리와 무관한 당신이 우리를 구명하려고 하는 마음은 잊을 수 없이 감사한 일인데, 만약 우리가 이렇게 고마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보고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욕하지 않겠소? 이처럼 사람은 진실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 생각으로나마 거짓말을 품을 수 있겠소' 하고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사현만 아니라 영장(營長)도 처형 직전까지 여러 번 설득했지만, 교우들은 끝까지 유혹을 물리치고 체포된 지 여드레만인 1866년 12월 13일 참수 당했다. 목격자 오순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들이 참수될 때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오사현과 그의 아들 오순보의 말은 이렇다.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처형장에 있던 거지들이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고 우루루 몰려 왔다. 오순보는 거지들을 쫓아내고 여섯 순교자의 머리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관졸들의 양해를 얻어 잘려진 머리를 각자의 몸에 차례대로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주었다. 그 후 군인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직했다. 삼일 후 순교자 가족들은 돈을 걷어 오사현에게 주면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오사현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 만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와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갔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한 영장 이근섭과 교섭하여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섯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군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가에다가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무덤 앞에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 올 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 손순화는 성 손선지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되자 가족을 이끌고 다리실로 피신해 왔다. 그는 이곳에 지내면서 도랑가에 가매장된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자기 집에서 건너다보이는 (현재의 무덤이 있는 곳) 산에 아버지를 모신다면 항상 지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묘 자리로서도 손색이 없는 땅이어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는 매제인 한정률(혹 경영 요한. 그는 처이자 손선지 성인의 딸인 손 막달레나와 함께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함)과,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가족, 그리고 신도들과 함께 1867년 정월 그믐 날(양력 1867. 3. 5) 시체를 반장(返葬)할 채비를 하고 가매장터로 갔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는 마음이 불안하고 떨렸다.
  • 그 날은 날씨가 청명했다. 가매장 터는 숲정이에서 빤히 쳐다보이는 곳이었다. 숲정이는 군인들의 연무장이었으며 지휘소가 있었다. 1801년부터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의 사형이 집행되어 왔다. 손순화 일행은 가무덤 앞에 당도하긴 했어도 당장 연무장의 지휘소에서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 끼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붉은 빛이 순교자들의 무덤만을 비추어 주었다. 이 빛의 도움으로 각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명패를 분간 할 수 있어서 염습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무사히 염습을 마친 일행이 시체를 메고 얼마만큼 와서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자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일행들은 이런 일을 보고 천주의 영적이라 감탄했다. 손선지 성인의 시체는 다리실(현재의 위치)에 장사하고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시체는 시목동에 장사하였다. (손순화의 증언 기록에는 시목동에 장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한재권 성인의 후손들은 다리실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현재의 위치로 성묘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정문호 성인이나 한재권 성인의 가족들은 훗날 손선지 성인의 곁으로 이 분들을 옮겨 모셨다. 오사현의 증언 기록은 위의 상황을 이렇게 보충해 주고 있다. 그는 1867년 2월(음력) 조 베드로, 이명서, 정원지 세 분의 시체를 그 자손과 함께 가서 이장하여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 위에 장사하였고,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시체는 그 자손이 먼저 이장하여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무덤은 가족들이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결국 봉분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 1922년부터 1923년에 걸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병인년(1866년) 한국 순교자들 중 시복 대상자들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 조사는 교황청 조사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서울교구 보좌 주교인 드브레드(유) 주교가 맡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 지방의 조사는 전동본당의 라크루(具) 신부가 주관하고 서기에는 김 도마를 임명했다. 이 작업은 1923년 6-8월, 2개월에 걸쳐 실시되었다. 1923년 6월 11일 오전 8시경이었다. 서울 교구 드브레드(유) 보좌주교, 전동본당 라크루 주임신부, 서기 김 도마, 다리실 공소 교우들, 김 베드로 회장, 김 방지거, 이 도마, 박 필립보, 김 마리아, 이 다두, 장 야고버, 송 라파엘 등 조사단 일행이 다리실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조사 작업을 하면서 분묘들의 위치를 표시한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네 개의 분묘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시복조사 심의 중 증인들의 증언을 참작해서 네 무덤을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정원지의 무덤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조사단의 추측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쉽게 판명된다. 그 이유는 첫째, 정원지는 이곳에 묻혀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정원지의 시체를 거두어 주고, 또 유상리 막고개로 이장해 준 오사현의 말을 살펴보자. 그는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 후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두 개를 사고 일꾼 12명을 사서 여섯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숲정이) 건너 부응바위 아래 도랑가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67년 2읠,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 등의 세 시체를 순교자들의 가족과 함께 가서 이장하여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장사했는데,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시체는 그 가족들이 이장하여 갔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지는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훗날 정원지의 가족들이 다리실로 이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 둘째로는, 다른 한 개의 무덤은 1868년 여산에서 처형된 일곱 분(사실은 여덟분)의 합동 무덤인 것이다. 이 무덤을 증언한 사람은 김영문(요셉)인데, 그는 다리실에서 살다가 1868년 6월 9일 여산으로 끌려갔었으나 용케 풀려 나왔었다. 그래서 그의 증언과 순교자 김성화 가족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이 합동 무덤을 '김성화(야고버) 외 6인의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래서 네 무덤은 손선지, 7인의 합동 묘, 정문호, 한재권의 무덤으로 정리된다.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는 1923년 6월 11일 이 현장에서 작성된 문서를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입수하여 1977년 11월에 현장을 답사하고 그 후 수차례에 걸쳐 현장을 조사했다. 그리고 호남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1983년 5월 9일부터 5일에 걸쳐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착수했는데, 유해들은 도면에 표시된 장소에 정확히 묻혀 있었다. 이 유해들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과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및 치과대학에서 5개월에 걸쳐 법의학적인 검사를 가졌으며, 이 검사 결과는 다시 교회사학자들의 문헌적인 검토를 거쳐 두 유해들의 주인공은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로 확정을 내리었다.
  • 성 이명서는 오사현의 주선으로 1867년 2월 18일(양력 3. 23) 조화서, 정원지와 함께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묻히었다. 그 후 손자인 이준명(아나돌)은 진안군 진안면 어은동 모시골에 자기 소유의 산을 마련하여 1920년 3월 22일 그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1968년 시복되던 해에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어 서울 절두산 순교자기념관에 안치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다시 전주교구로 모셔와 보관하고 있다가 1988년 10월 1일 이곳에 안장하었다.
  • 이곳 성지에 묻힌 순교자들의 무덤 중에서 성인들의 무덤은 본래 발굴된 곳에서 몇 뼘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거의 같은 장소에 안장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남기기 위해 발굴한 장소에 표석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실명(失名)된 순교자들의 무덤은 먼저 8인의 무덤으로 발굴된 순교자들에게 번호를 부여하였다. 순교자 김영오가 묻힌 곳에서 우측으로 1번부터 8번까지는 일명 8인의 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분들을 안치했고, 9번째는 방아골에서, 10번째는 현재의 십자가 탑 아래쪽에서 발굴된 분을 안치했다. 그런데 11번째의 무덤은 가무덤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1983년 5월 천호산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할 때 이곳 천호공소의 노령의 교우들로부터 이러한 증언을 들었다. 현재의 피정의 집 뒷 편으로 산수골로 넘어가는 고개의 우측 산 날에는 옛 부터 순교자의 무덤으로 전해 오는 묘가 봉분이 거의 없어진 상태로 있었다. 천호공소 회장은, (1983년의 5월의 말로) 20년 전까지 그 무덤의 사초를 맡아 왔었던 이전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무덤에는 여자 순교자가 묻힌 것으로 알려져 왔다고 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가정해 본다면 고산 산수골에 살다가 1868년 10월 여산에서 순교한 박성진의 아내라고 불렸던 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여러 해를 사초해 온 천호공소의 이종권 회장과 노인 신도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갔더니, 순교자의 무덤 자리에 엉뚱하게 낯모르는 묘가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무덤에 어떤 표석이나 분간할 만한 표시를 해 놓았던 것도 아니고, 또 무덤을 관리한지도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누구도 묘의 위치를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한 새 묘가 조성된 데에는 이런 저런 말이 있었지만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서 참고하기로 하고 발굴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차후 발굴될 경우를 생각해서 우선 가무덤을 조성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