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지방의 교우촌

  • 성지 배경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하여 주로 충청도 지방의 교우들이 천호산 주변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 되었다. 당시의 신앙 선조들은 의식주가 보장되지 못하는 주변의 여러 여건들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같이모여 두 서너 시간 씩 저녁기도(만과)를 바치며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고 주변 골짜기들마다 불어나는 공동체를 지키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지켜 나갔다. 그러나 날로 심화되는 박해의 칼끝은 이 주변 신앙공동체에도 피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수많은 신앙선조들이 체포되어 가까운 여산 관아로 끌려가 갖은 고통을 받으며 순교의 영광을 하느님께봉헌하였다. 1866년 병인 박해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의 시신도 우여곡절 끝에 이곳 천호산에 묻혔다. 그리하여 이 천호산 일대에는 여산과 전주에서 순교하신 많은 이들이 잠들게 되었다. 이 천호산 주변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써 조선시대 조정에서 고흥 유씨 문중에 하사한 땅이었다. 당시 남의 땅에서 살던 신자들은 산 자들의 집이건 죽은 자들의 무덤이건 언젠가는 쫓겨나야 할 안타까운 처지였다. 그런데 1909년 되재성당 베르몽(목세영)신부를 중심으로 주변 공소회장 등 12명의 신도들이 어렵사리 돈을 모아 고흥 유씨 문중 대표들과 협의 한 끝에 150(약45만평)정보의 땅을 매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공소 신자들의 생활터전과 수 많은 순교자들의 무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941년경)150정보 중에서 순교자 들의 묘와 종적을 알 수 없지만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주변 땅 (현 성인묘역을 중심으로하는)75(약23만평)정보를 교구에 봉헌하게 되었다. (이 땅을 봉헌 한 이들은 베르몽(목세영)신부.김여선.이만보.장정운.김현구.박준호.민감룔.송예용등 8분이다.)
  • 여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주거지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 할 교우촌은 넓은 바위이다. 대아리 저수지에서 동쪽으로 5㎞쯤 협곡을 따라 산천리, 왕재, 은천리를 지나면, 산에 묻힌 골짜기에 지금은 흔적마저 찾기 어렵지만 유서 깊은 넓은바위 교우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교우마을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일찍이 고산 관아에 천주도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866년(병인년)1월 여러 교우들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상당히 오래된 교우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교우들의 출신지는 대개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이었다. 이 교우촌이 겪은 가장 큰 박해는 1868년(무진년)에 있었다. 이 때 이 마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젖먹이를 둔 여인까지 수십 명이 여산으로 끌려가 그 중 16명이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은 김성첨(토마스)였는데, 그의 약전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그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출신 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년 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년 9월 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교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죄상을 꾸짖으며 개과하여 배교한다면 여산 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교우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영장은 사학(邪學)의 괴수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으며, 마을에서 발견된 천주학의 서적과 상본들은 모두 네가 준 것이 사실이며 그 출처를 밝히라고 닥달했다. 그는, 본래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가정이어서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가 돌아가신지 오래되어 그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교우 일당을 불라 하면서 혹독하게 형벌하는 바람에 자기와 함께 끌려온 교우가 전부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영장은 더욱 분노하며 혹독하게 형벌을 내렸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기는커녕 태연자약 하자,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해서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다. 그들의 집에 남은 가족들은 너무 가난해서 옥바라지를 해 줄 처지가 못되었다. 그런데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김성첨과 함께 일가족 6명이 옥고를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치명할) 이 때를 기다렸는데 천당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받으라."하며 격려했다. 김성첨은 교우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교우들에게 옥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이러한 교우들의 기도생활을 보고 옥을 지키던 군인들은 능욕하기를, "저놈들은 죽어 가는 주제에 무엇이 즐거워 배가 고픈 줄 모르고 천주학만 한다."하며 비아냥거렸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교우들은 그해 10월 21일(양력 12. 4)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월 10일(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세(어떤 기록은 57세)였다.
  • -->